‘라이온 킹’ 이승엽이 돌아왔다! 이승엽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야구계가 들썩였다. 지난 2003년 한국을 떠나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승엽.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후배들을 합법적으로 군 면제 시켜줘서 ‘합법적 군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한 그.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엽을 파헤쳐보자. /디스이즈게임 작은달
이승엽은 독특한 선수다(필자의 생각으로).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성공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고교리그에서 투타 고른 활약을 펼친 이승엽은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한다.
좌완 투수 유망주로 기대가 높았으나 고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첫 스프링 캠프에서 박승호 코치에게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 받았고 이후 완전히 타자로 전향했다. 타자로 전향한 이승엽은 과거 투수였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낸 그는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프로입단 3년 차가 되는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타격력이 살아나면서 홈런 1위(32개), 타점 1위(114개), 최다 안타 1위(170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이승엽 시대의 개막이었다.
1998년의 활약도 1997년에 뒤처지지 않았다.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분투한 이승엽은 타이론 우즈(OB)에게 아쉽게 최다 홈런 1위를 내줬지만 한 시즌에 홈런 38개, 100타점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기록이 아니었다.
이어진 1999년은 이승엽이 한국 최고 타자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홈런(54개), 타점(123개), 득점(128점),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5관왕에 올랐고 이때 이승엽이 세운 54개 홈런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이승엽 개인 기록 제외)
기록 | 연도 | 선수 | 소속 | 팀 경기수 | 달성 당시 나이 | 주석 및 기타 |
22개 | 1982년 | 1 | ||||
27개 | 1983년 | 2 | ||||
30개 | 1988년 | 해태 | 7 | |||
35개 | 1991년 | |||||
41개 | 1992년 | 장종훈 | 빙그레 | |||
42개 | 1998년 | |||||
54개 | 1999년 | 삼성 | ||||
8월 2일 대구 롯데 전 5회말 2-2 선두 타자로 나와 문동환의 초구를 1점 홈런으로 연결시켜 시즌 43호 홈런 기록 | ||||||
56개 | 2003년 | 이승엽 | 삼성 |
참고: 위키백과
2000년도에도 이승엽의 활약은 계속됐다. 00시즌은 역대 최고 타자 스타(박재홍, 송지만, 이병규, 김동주, 우즈, 박종호 등)들이 총 집합한 시기였지만 득점1위를 차지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해가 타격폼을 바꾼 시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승엽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다.
2001에는 홈런(39개)로 홈런 1위를 차지했고, 2002년에는 타격 4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인 2003년에는 아시아 한 시즌 홈런 신기록인 56개를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불방망이가 끝까지 이어진 것이다.
위 같은 활약으로 ‘국민타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승엽은(올림픽에서 활약한 것도 포함된다) 2003년 한국을 벗어나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서도 부상에 시달렸으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멋진 활약을 보였다. 도쿄돔 기둥에 이승엽 얼굴이 장식될 정도였으니 더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본다.
출처: LeeLove.co.kr
2000년
2000년 이승엽은 팔꿈치 수술로 군 면제를 받았지만 올림픽에서 자신을 부르자 지체 없이 출전했다. 하지만 부상회복 중인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9경기, 28타수 5안타 1홈 7타점 4사구 3개 12삼진. 타율 0.179… 한국 시리즈에서 이승엽이 보여줬던 활약에 비하면 정말 ‘비참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국민타자’ 이승엽은 마지막에 강했다. 8회 2사 2,3루에서 앞선 이닝에서 연속 삼진을 당하던 이승엽이 괴물투수 마쓰자카를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쳐낸 것이다. 결국 이 안타가 한국에 동메달을 안겨줬고 많은 후배에게 군 면제를 선물했다. 정말 금쪽 같은 안타였다.
2002년
한국 시리즈 중 최고로 회자되는 LG vs 삼성 6차전 이야기다. 여기서도 이승엽은 ‘마지막’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 경기는 역전에 역전에 역전이 거듭되는 명경기였다. 모두가 숨을 지키고 지켜볼 정도로 경기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9회말 삼성이 3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이 타석에 섰다.
9회말, 1사 2,3루… 이 때 일부 팬이 ‘제발 병살당하지 말고 삼진에 당해라’라고 말할 정도로 이승엽은 한국 시리즈에서 부진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거짓말 같은 쓰리런 포를 날리면서 삼성과 LG를 동점으로 만들어 놨다. 그리고 이승엽에 이어 타석에 선 마해영이 솔로 홈런을 터트리면서 삼성이 한국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
2006년 WBC에서 이승엽은 일본을 상대로 예선전에서 2점 홈런, WBC 본선에서 적시타 등 맹타를 휘두르며 한국을 4강에 올려놨다.
2008년
대망의 2008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승엽은 ‘후배들을 도우러 왔다’고 밝혔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4번 타자로 이승엽을 끝까지 믿었고 결국 일본과 준결승 8회에서 이승엽이 투런 역전 홈런을 때린다. 2:2 동점상황에서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4:2로 역전당한 일본은 투수진이 흔들리면서 6:2로 한국에 패배했다.
이 경기가 끝나고 이승엽이 후배들에게 미안했다는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이승엽의 부담감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부담감을 다소 털어낸 이승엽은 쿠바와 대결한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1회 투런 홈런을 치면서 완벽한 활약을 펼쳤다. 이승엽의 기세를 이어간 한국팀은 결국 3:2로 쿠바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게다가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고 차지한 9전 전승 금메달이었다.